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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LIFE

믿음은 느낌일까? 의지일까?


1991년 봄, 대구에 있는 한 교회에서 문득 떠올랐던 질문이다. 믿음은 느낌에 속하는 것일까, 아니면 의지에 속하는 것일까? 그 당시, 나는 하나님을 느끼고 싶었고, 만지고 싶었다. 하지만, 도저히 만질 수도 없었고, 느낄 수도 없었다. 다만, 성경책만 부여 잡고 기도를 할 수 밖에 없는 심경이 답답했었던 것 같다. 어린 마음에 하나님이 진정으로 존재하신다면, 예수님이 진정으로 우리를 위해 죽으셨고, 부활하셨다면 내가 일상 속에서 보고 듣고 만지는 세상 모든 만물처럼 하나님과 예수님도 그렇게 보고 듣고 만질 수 있는 존재이기를 기대했었던 것 같다. 그런 나의 기대와는 달리 그 분들은 나에게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았고, 들려 주지 않았다. 그래서, 교회에서 조금씩 거리가 멀어진 것 같다.
2010년 1월 같은 질문을 나에게 던진다. 믿음은 느낌일까, 의지일까? 이제는 답이 달라졌다. 믿음과 하나님은 모두 인식에 속한다. 믿음은 내가 의도적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내가 의지를 가지고 성경책을 읽고, 의지를 가지고 새벽기도에 가고, 의지를 가지고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것 그 자체가 하나님과 믿음의 증거라고 생각한다.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 이 거추장스런 몸을 주신 분은 누구인가? 그 분은 왜 우리에게 몸을 주셨고, 그 분에게 저항할 의지도 함께 주셨는가? 애초에 만드실 때, 우리를 완벽한 종으로 만드셨다면 우리가 이토록 고통과 갈등 속에서 방황할 이유가 없었을 텐데, 왜 슈퍼에고를 만드시고 다시 걸리적 거리는 에고를 만들어 놓은 것일까? 하나님은 장난꾸러기?!
 나는 하나님의 종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친구라는 사실을 이제는 안다. 1991년도에도 이 사실을 알았지만, 나는 느끼고 싶었다. 만지고 싶었다. 느낄 수 없었고, 만질 수 없으므로 하나님을 부정했다. 하지만, 요즘에는 이 사실을 아는 것이 전부라는 생각이 든다. 이 사실을 알고, 일상의 매순간마다 하나님을 생각하고, 그 분과 대화하고자 하는 것, 이것이 전부 인 것 같다.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조차 얼굴을 보여 주지 않았다.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의 의지로 그 분의 종이 되기를 원하시는 것 같다. 로보트가 아니라, 동등한 관계의 친구를 원하시는 것 같다. 그래서 우리에게 의지를 주셨고, 의지를 사용해서 그 분 가운데 살아가기를 원하시는 것 같다. 야곱과 씨름해서 져주기도 하고, 모세와 협상을 해서 양보도 하고, 인간보다도 더 인간적인 하나님을 통해서 내가 어떠한 상황에 있던지 언제나 내 곁에 그 분이 계시다는 것을 믿을 수 밖에 없고, 그 분의 친구로 살아가기를 열망할 수 밖에 없다.